[요즘 트렌드] 영웅이 아닌 인간을 발견하다 《이순신의 7년》

  • 등록 2018.06.28 11:54:18
크게보기

1.png

 

“후대 사람들이 우리를 기억해 주겄지?” 2년 전 이순신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 ‘명량’의 후반부에서 거북선에 탑승했던 민초들의 대사다. 신격화된 이순신이 아니라 백성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충청도 아산 사투리로 말하는 인간 이순신을 그린 <이순신의 7년>을 소개한다.

 

기획 편집부

 

 

신(神)이 아닌 인간(人間) 이순신

 

“지는 지댈 디 없는 백성덜의 신하가 되구 싶구먼유.”

 

지금까지 이순신은 신중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에, 두려움 없는 용맹함과 뛰어난 전술로 왜군을 막아낸 무적의 영웅으로만 알려졌다. 정찬주 작가가 그려낸 《이순신의 7년》에서는 그동안 ‘영웅 이순신’이라는 신화적 타이틀에 가려져 있던 그의 인간적인 뒷모습을 재현해내고 있다. 용맹함 이면의 두려움, 결단을 내리기까지의 고민과 망설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 속에 가려진 유약함 등 한 인간으로서의 입체적 면모를 보여준다.

  

이순신의 이러한 모습은 충청도 아산 사투리에 묻어나면서 친근하고 인간미 넘치는 인물로 되살아난다. 등장인물들이 맛깔난 사투리로 이야기한다는 점은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갈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 할 만하다. 충청도 아산 사투리로 이야기하는 이순신, 전라도 사투리로 이야기하는 이순신 휘하 남도의 장수들, 그 지방의 토박이말을 쓰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발표되었던 많은 역사소설에서 이순신은 표준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나 팔 세부터 삼십이세로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충청도 아산에서 살았던 이순신이 표준말을 쓰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사람은 언어라는 틀 안에서 생각하고, 언어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게다가 언어는 단순히 의사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그 당시의 문화 및 생활상을 반영한다. 사투리로 말하는 이순신을 그려냈다는 것은 인물의 진짜 모습, 진짜 생각을 꾸밈없이 표현해내겠다는 정찬주 작가의 의지 표명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영웅 이순신’이라는 눈부신 광휘에 가려져온 ‘진짜 이순신’을 재현해내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시대를 지탱해온 조선 백성과 함께한 이순신

 

“바람이 강할수록 파도는 더욱 살아난다.”

 

《이순신의 7년》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 한복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전운을 감지하고 병사들과 함께 전쟁에 차곡차곡 대비하는 이순신을 먼저 만나게 된다. 이야기의 절정만을 향해 치닫는 다른 소설과의 차이점이다. 

 

이순신은 지인에게 ‘호남이 없다면 국가가 없소이다(약무호남 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이 말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분연히 일어섰던 백성들이 없었다면 위기를 극복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이며, 《이순신의 7년》에서는 이 점에 주목하여 이순신이라는 영웅을 있게 한 선비, 장수, 승려, 천민들의 의기와 충절을 이야기한다. 그중에는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도 있지만 의로운 마음만으로 일어나 싸운 의병, 백성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책임을 다했던 관군, 목탁 대신 칼을 들었던 의승 수군, 전쟁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삶을 개척해나간 민초 등 이름 없이 제 몫을 살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정찬주 작가는 16년 전 서울에서 남도 땅으로 낙향한 뒤 곳곳에서 임진왜란 때 분연히 일어섰던 백성들의 충절과 애환을 마주하면서, 안타까움과 사명감으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인간 이순신의 이야기에서 더 나아가 시대를 떠받들어온 조선 백성의 삶을 재조명하고, 알게 모르게 우리 머릿속에 자리한 패배주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위기 속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우리 민족의 혼과 기백을 소설 속에서 되살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고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있다. 남도 백성들의 역할이 정당하게 대접받고 있지 않다는 현실이다. 의병장들은 물론이고, 관군과 의병장들에게 목숨을 맡겼던 민초들의 절절한 사연도 역사 뒤편에 묻힌 느낌이다. 

 

목탁 대신 칼을 들었던 화엄사, 흥국사 승려들로 구성된 의승 수군(義僧 水軍)의 호국 의식이나, 대부분이 남도 출신인 이순신 휘하 장수들의 피 끓는 충정에 대한 이야기도 인색할 뿐이다. 성웅 이순신이라는 눈부신 광휘(光輝)로 말미암아 그들의 진면이 퇴색해버린 것은 아닐까.”

 

- 작가의 말 중에서

 

 

1권 백성의 신하 이순신

 

“지는 지댈 디 없는 백성덜의 신하가 되구 싶구먼유. 무장이 되어 변방 백성덜을 지켜주는 신하가 되겄슈.”

 

이순신은 왜구의 노략질로 인한 남해안 촌민들의 처참한 모습을 본 뒤, 문관으로 입신하여 임금의 신하가 되기보다는 무장이 되어 변방 백성의 신하가 되기로 맹세한다. 선조 24년(1591년)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은 수군들을 훈련시키고 화살과 화약을 만들며 소포 바다에 철쇄를 설치하는 등 전란에 철저하게 대비한다. 

 

특히 비밀리에 거북선을 건조하여 임란 직전에 함포 사격 훈련까지 마친다. 며칠 후, 임진년(1592년) 4월 15일(음력) 이순신이 예감한 대로 부산포 앞 절영도 바다에 왜선 구십 척이 출현하면서 가장 참혹했던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장수의 숙명은 적과 싸우다 이기고 죽는 겨. 살아남아 부귀영화 누린다믄 비겁헌 일이여. 장수는 잘 죽는 것이 훈장인겨. 부귀영화는 고상헌 부하덜이 갖으야 써. 그라지만 그냥 죽어서는 안 되야. 워처케 살았는지 기록이 있으야지. 인자 나는 앞으루다가 워처케 싸우고 죽음까정 가는지를 명명백백허게 밝힐 겨.’  _102~103쪽

 

적과 싸우다 죽는 것을 지휘관인 자신의 몫으로 여기고 부귀영화를 아랫사람들의 몫으로 돌리는 이순신의 자세는 결국 죽음으로 전투를 마무리했던 그의 삶을 관통하는 표어인 셈이다. 죽음도 아무런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밝혀야 한다는 이순신의 신념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는 경구에 함축되어 있다. 이순신의 이런 각오를 따라 전투에 임했던 명량해전의 사망자가 매우 적었다는 사실은 지휘관으로서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지휘관은 엄부자모멩키루 아버지같이 엄허다가두 어머니같이 자애로와야 허는디 나는 그라지 못 혀.” “지헌테는 참말로 잘혀주시는디요잉.” “세상의 어머니를 보믄 나는 택도 없어. 때로는 바다와 같이 깊고 넓은 어머니를 닮아야 허는디 말이여.” 이순신이 송희립에게 보통 사람으로 보일 때는 바로 이런 순간이었다. 어머니 변 씨 부인을 생각하거나 말할 때의 이순신은 농촌 마을에 사는 중늙은이나 서원에서 책을 읽는 백면서생 같았다. 어머니를 봉양하고 믿고 의지하는 모습이 그들과 똑같았던 것이다.  _225~226쪽

 

평범한 중년 남성 이순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어머니 곁에서 효도하지 못하는 자신의 불효를 괴로워하는 아들 이순신. 남편과 아버지로서 가정을 소홀히하는 자신을 책망하는 이순신. 세상을 떠난 큰형 이희신과 작은형 이요신을 대신하여 형수와 여섯 명의 조카들을 걱정하는 집안의 가장 이순신. 무엇보다 ‘효(孝)’를 중요시하는 아들 이순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애틋하다.

 

이순신은 한양 쪽을 향하고 서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신은 싸울 준비를 다 혔구먼유. 전하께서 명을 내리신다면 워디라도 달려가 목숨 바쳐 지키겠구먼유. 의지헐 데 없는 백성을 구할 거구먼유.’  _307쪽

 

원리원칙주의자였던 이순신이지만 목민관으로서도 병사들을 포함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보살폈던 덕장(德將)이었다. 따라서 백성과 병사들은 이순신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존경하며 반기를 들 생각을 품지 않았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전멸하게 만들고 백성들도 대부분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 상황에서, 이순신이 돌아오자 백성들은 울며 절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고 전해진다. 이순신은 철저히 백성의 신하였던 셈이다. 

 

아무튼 이순신이 진로를 무과 급제로 바꾼 것은 장인이 보성 군수로 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순신이 보성에 내려가지 않고 아산에 살았다면 문과 공부를 계속했을 것이었다. 이순신은 보성에서 의지할 데 없는 해안 고을 촌민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나서 비로소 ‘임금님을 가까이서 모시는 육조의 문관이 되기보다는 무장이 되어 변방에 사는 백성들의 신하가 되겠다’고 굳게 맹세했던 것이다.  _243쪽

 

이순신이 본래 과거 시험에서 문과를 준비했다가 무과로 변경한 시점이 해안 고을 촌민들의 비참한 모습을 목도한 이후라는 것은 이순신의 목민관으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아랫사람을 아끼는 모습도 이순신의 인간적인 성품을 보여준다. 이순신은 이전 수사들과 달리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상가에 문상을 간다. 부하 박만덕의 상갓집에 친히 찾아가 쌀과 고기를 베풀고 상주인 박만덕에게 맞절하며 위로하는 장면은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던 이순신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더욱 인간적인 매 력을 느끼게 한다. 

 

 

2권 거북선 제조자 이순신

 

조선군은 부산과 동래 연안 바다에서부터 700척의 왜선을 막지 못했고, 잇따른 관군의 패배 소식에 선조는 한양 도성을 버리고 쏟아지는 빗속에 파천 길을 떠난다. 조정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휩싸인 가운데 이순신 함대는 옥포 해전, 합포 해전, 적진포 해전에서 승리하고, 사천 해전에서는 드디어 비밀 병선 거북선으로 왜 수군 장졸들을 혼비백산시켜 승전한다. 그리고 잇달아 당포 해전, 당항포 해전, 율포 해전에서 크게 이김으로써 남해 바다를 지킨다.

 

“원 공, 거북선이 워째서 돌격선인지 봐유. 일찍이 왜적덜이 쳐들어올 것을 염려혀서 특별히 건조헌 거북선이지유.” 

“지금 거북선의 위력을 볼 수 있겠소이다.” 

“아까두 말혔지만 거북선은 돌격용 전선이지유. 앞에는 용머리를 설치혀서 그 입으루다가 대포를 쏘구, 등에는 적덜이 달라붙지 못허게 쇠못을 꽂았으며, 갑판을 덮어버려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지만서두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 맹글었지유.”  _302쪽

 

이순신을 이야기할 때 거북선은 빼놓을 수 없는 소재다. 2권에서는 47세의 이순신이 판옥선 전투 전술에 능통한 77세의 정걸을 통해 부서진 판옥선들을 수리하고 비밀 전선인 거북선을 제조하게 되는 배경이 펼쳐진다. 정걸은 맹선에다 한 층을 올려 판옥선을 만든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정걸은 한 층을 올린다면 수군들이 비바람을 맞지 않고도 전투를 할 수 있는 전선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한다. 정걸이 고민하던 차에 나대용이 거북선 제조의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바로 구례 화엄사 주지인 지운대사가 ‘전선을 맹글라믄 돌거북 모냥을 참고허라’라는 조언을 나대용에게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이순신은 본격적으로 비밀 전선인 거북선을 제조하게 된다. 

 

‘성웅 이순신.’ 그동안 우리에게 이순신은 신화적인 존재였다. 임진왜란 7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해왔는지, 목민관으로서의 이순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누구보다 빨리 밥을 먹는 이순신. 주역 점괘를 풀며 전쟁의 기운을 감지하는 이순신. 계급에 상관없이 상가에 조문하러 가는 이순신. 가진 것 없이 사는 떠돌이 어부들일지라도 정착을 돕는 이순신.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이순신.

  

모든 이순신들이 모여서 한 명의 인간 이순신이 된다. 각자 알고 싶은 이순신이 있다면 《이순신의 7년》을 펼쳐보는 건 어떨까. 

부관리2 admin2@admin.com
tvU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무단복제 및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지방정부 tvU(티비유) | 발행인 겸 편집인 : 이영애 | (본사)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16길 1, (분원) 서울 종로구 경희궁3나길 15-4 | Tel : 02-737-8266, 02-739-4600| E-mail nlncm@naver.com 등록번호 : 서울, 아04111 | 등록일ㆍ발행일 : 2016.07.19 | 사업자정보 : 101-86-87833 청소년 보호 관리 담당자: 편집부 차장 /청소년 보호 관리 책임자: 발행인 지방정부 tvU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무단복제 및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