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승빈 명지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정부는 지난 2015년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세종특별시에서 지방자치박람회를 개최한 바 있다. 필자도 지방자치 20년 평가와 과제라는 큰 주제 하에 발제자의 한 명으로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뿌리를 찾아보는 의미 있는 작업을 하게 된 바 있다. 그러나 문제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1949년 건국 이후 최초로 제정된 지방자치법이 있었으며 동법의 개정을 통한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엄연히 이 땅에 지방자치 실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역사가 말소된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필자는 역사를 왜곡하거나 더군다나 역사를 날조하고 싶지는 않다.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면 1888년의 ‘삼신법(三新法, 군구정촌편별법, 부현회규칙, 지방세규칙)’과 1947년의 일본 지방자치법과는 그 내용과 취지가 완전히 판이함에도 불구하고 1947년 이후부터 일본의 지방자치 역사를 다루는 학자는 극히 드물며 심지어는 우리나라에서 일본을 안다고 하는 학자들도 일본의 지방자치 역사를 심지어는 에도시대의 270개의 번(蕃)제도에서 찾는 경우도 종종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지방자치역사를 둘러보아도 영국의 19세기, 프랑스의 나폴레옹시기, 독일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언급이 등장하면서 흔히들 우리나라는 오랜 중앙집권적 국가이고 유럽 및 일본은 오랜 기간 지방분권적 국가를 운영하여 왔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르며 우리는 지방자치를 토착화시키는데 20년은 매우 짧아 어려운 환경이라고 자조적(自嘲的)인 평가를 내리기 일쑤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풍토는 일본계 3세 학자이면서 세계적으로도 저명하고 영향력 있는 프랜시스 후쿠야마, 그리고 남북한 정치에 대한 국제정치 전문가로서 누구보다도 인정받고 있는 브루스 커밍스 등이 우리나라의 지금과 같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뤄진 것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근대화된 제도이식이라는 주장이 일견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질 정도인 것이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지방자치 제도화가 갖는 중요한 점은 주민들에 의한 민주적인 통제시스템이 언제 어떠한 계기로 착근되었느냐는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하여 필자는 최근의 논문에서 1895,1896년의 갑오·광무개혁 시기부터 일제강점기, 그리고 1948년 제헌헌법과 1949년의 지방자치법 제정까지를 살펴본 바 있다(임승빈, 2015). 본 연구에서는 우리나라의 지방자치제도 형성과 변화를 조선말-일제강점기-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의 1949년 지방자치법 제정에 이르기까지를 편년체 형태의 시대적 구분으로 끝내지 않고 신제도주의관점과 제도의 동형화 관점에서 파악했다. 분석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근대적 지방자치 제도 형성과정에 있어서 일본의 지방자치제도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이론 및 고증적인 분석이다. 논문에서는 갑오·광무개혁 시기에 추진했던 구한말의 지방자치제도 개혁의 근대적 주체성을 밝혔다. 또한, 1906년 일제 통감부의 통치와 1910년 이후 일제강점기에서의 지방자치 제도이식이 1949년의 우리나라 지방자치법 제정과 지금의 지방자치제도 형성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느냐가 본 논문의 핵심인 제도의 동형화현상일 것이라는 가정으로 출발했다.
즉, 우리나라의 근대적 지방자치제도 형성과 동인(動因)이 과연 갑오·광무개혁 시기의 지방자치 제도가 당시의 일본의 자치제도로부터의 영향,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통한 제도 이식이 1949년의 지방자치법의 내용과 어느 정도 연속 또는 단절되었느냐이다. 물론 지금의 한·일 양국의 지방자치제도 양상이 완전히 다르지도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지방자치 제도화가 갖는 중요한 점은 주민들에 의한 민주적인 통제시스템이 언제 어떠한 계기로 착근되었느냐를 밝히는 것이 연구의 시작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에서는 갑오·광무 개혁시기의 향회(鄕會)제도의 생성과 단절, 그리고 연속이 중요한 분석대상이 되었다. 갑오·광무개혁 시기 추진하였던 향회 제도와 향회에서 선출한 좌수 및 향장제도가 주민들 스스로에 의하여 지방자치제도로서 착근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906년 12월의 통감부의 대향회(大鄕會)-도향회(都鄕會)-향회(鄕會)와 좌수 및 향장제도의 폐지에 반발하여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기존 향장을 ‘민권향장(民權鄕長)’이라 유임케 하고 주민들이 급여를 마련하였으며 또 일부 조선인 군수들은 향장을 없애면 민권사상이 다시금 기댈 곳이 없다고 판단하여 군회(郡會)규정을 만들고 면촌(面村) 제도를 조직한 사례를 보면 광무개혁기의 향회는 군 행정기구의 보조기구나 하부기구가 아닌 관권을 견제하고 지방민의 자치의식을 심어주는 근대적 제도의 시초라고 평가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갑오·광무개혁에서의 향회(鄕會)제도는 근대성을 지닌 지방의회의 제도화를 시도했으며 일제 통감부가 영향력을 발휘했던 1906년까지는 지역적인 편차는 있었으나 착근 중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화의 시도가 일제에 의하여 단절되었으나 다시금 우리나라의 1949년 지방자치법 제정과 1952년 지방자치제 실시 과정에서 과거 갑오·광무 개혁기의 향회(鄕會)제도와 연관성이 높다는 점도 밝혔다. 즉, 일제강점기 초기의 부·면 협의회, 그리고 강점기 후기의 부·면의회의 제도와 향회(鄕會)제도와는 단절되어 있으며 갑오·광무개혁기의 향회(鄕會)제도는 1949년 지방자치법과 1952년의 시도의회-시군의회-읍면의회 제도로 생존과 복귀되는 현상을 규명하였다. 구한 말 당시부터 지방자치의 제도화 과정에서 정치행위자들이 적극적으로 일본의 근대적 제도 이식을 단행을 통해 제도의 동형화 현상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틀렸다. 어윤중·박정양·유길준 등을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이면서 정부의 고위관료들이 조선의 정치체계와 일본의 정치체계가 다른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독자적인 지방자치 제도화를 꾀했다는 점 역시 규명한 점은 고증적 관점에서도 의의가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갑오개혁의 후기와 광무개혁의 주체성에 대해서는 논의를 한 바와 같이 갑오·광무개혁시기에 추진했던 근대적인 지방자치제도는 일제 강점에 의해 급진적 변화와 불연속성으로 해체와 대체(breakdown and replacement)가 되었고, 1949년의 지방자치법이 오히려 갑오·광무개혁과 연속성을 띤 생존과 복귀(survival and return)로의 제도가 연속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확대해석하자면 국내외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한국의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일제 강점기 시대의 근대적 제도 이식에 있었다는 주장은 논리적 및 실증적 근거가 없으며 역사적 사실에도 맞지 않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후 40여 년이 지난 1988년에서 1994년의 논의에 의하여 새로이 제정된 지금의 지방자치법이 오히려 1947년의 일본 지방자치법과 제도의 동형화 현상이 심했다는 점에 대해서 필자의 또 다른 논문(임승빈, 2008)에서 밝혔으나 한 명의 사회과학자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수가 없다. 흔히들 역사를 잊은 나라는 미래가 없다고 하지만 새로운 지방자치 100년을 위해서도 지난 120년간의 우리의 지방자치 제도가 왜 단절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은 승계하여야 하고 어떤 부분은 개혁하여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