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훈 대통령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기획단장
대학과 대학원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지방과 중앙에서 오랜 기간 몸담아 온 필자에게 10여 년전 외국 유학과 주재관 근무 등 4 년여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대상지로 주저 없이 미국을 선택한 것은 미국의 지방자치가 풀뿌리 자치의 원형이고 우리 지방자 치의 지향점이라는 그동안의 막연한 동경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국에 체류하는 4년여 동안 현지 공무원들과 접하고 때로는 같이 일을 하면서 ‘미국의 지방자치시 스템은 우리보다 느리고 불친절하며 게다가 비효율적인데 그럼에도 왜 미국 지방자치를 선진 지방자치의 모델’이라고 하는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의문은 뉴저지주의 버겐 (Bergen) 카운티 내에 티토보로(Teterboro Borough)를 방문하면서 더해졌다. 상주 인구 18명(12 명 성인, 6명 청소년)의 이 작은 도시는 12명의 성인이 시장과 의원을 맡고 있고, 교육과 경찰, 소방, 쓰레기와 상하수도 처리는 인근 지방정부에 일정 비용을 주고 위탁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미국의 지방정부는 우리 시군구와 같은 일반적인(general purpose) 지방정부 4만여 개와 그 외 특별한 목적(special purpose-교육, 소방, 경찰, 상하 수도 등)의 지방정부 5만여 개 등모두 9만여 개에 이르고 있다. 이들 지방정부는 명칭, 정부구성형태, 선출방식, 권한과 기능, 재정 시스템, 주(State)와의 관계 등에서 모두 같지 않고, 우리와 같은 통일되고 체계적인 지방자치시스템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면적이나 인구 규모도 900 만 명이 넘는 뉴욕시에서부터 12 명에 불과한 지방정부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하고 있다.
필자는 미국 체류 시절 늘 ‘미국 지방자치는 왜 선진 모델인가’라는 것에 의문을 품고 그 대답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이기까지 한 미국 지방자치가 선진적이란 평가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인 것 같다. 첫째, ‘주민자치원칙에 따른 다양성(Diversity)’의 존중이었다. 미국 지방자치의 생성은 지극히 자연 발생적인 것이었는데, 유럽에서의 이민자들이 신대륙 여기저기에 집단으로 정착하고 촌락을 이루는 과정에서 공동체 유지를 위해 대표자를 선출하고 기초 기능인 경찰과 소방, 교육, 쓰레기 등을 처리하게 하면서 지방정부(town 등)가 생겨난 것이다. 이어 다시 몇 개의 촌락이 모여 광역적 기능의 주(State)정부를 만들고 이어 주정부가 연합하여 연방(Federal) 정부가 되는 상향식 형태였다. 그래서 미국의 지방자치는 기본권에 가까운 헌법적 가치이자 기초 자치단체 전통이 강한 풀뿌리 지방자치의 전형이 되었던 것이다.
통상 미국의 지방자치는 ‘지방자치의 전시장’이란 표현을 한다. 명칭만 해도 City, Town, Township, Borough, Village, Parish 등으로 다양하고 정부 구성 형태에 따른 권한과 기능도 천차만별이다. 어떤 경우에는 Town안에 동일한 명칭의 Town이 있는 등 행정 계층 또한 뒤죽박죽인 경우도 있다. 필자가 시라큐스대학 유학 시절 담당교수에게 우리의 지방자치법 처럼 미국의 지방자치법에 대한 존재를 물었다가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두 번째는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가치가 행정의 효율이나 통일성, 신속성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시되고 있다.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현안이나 사업, 제도 변경의 경우 의회와 자문위원회, 청문회, 공청회 등이 지루할 만큼 반복 되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때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거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과 의원들의 논의와 찬반투표까지도 지역케이블을 통해 생중계되는 경우도 많았다.
세 번째, 미국의 경우 지역 주민의 자기 지역과 그 지역을 관리하는 지방정부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다르다. 통상 지방정부의 주된 재원은 재산세(주택)인데, 지방 정부의 내년도 사업과 예산이 결정되면 각 주민(가구)이 부담하는 재산세의 비율은 주민 총회 또는 주민 설명회 등에서 결정된다.
필자가 살던 지방정부(Cresskill)의 경우 인구 5000명 정도의 작은 도시인데 가구당 재산세 부담은 한화로 연 1만 원(재산세율 1%) 정도의 적지 않은 규모였고, 신규 사업이나 경비 인상은 주민의 추가적인 세부담을 유발하는 것이어서 주민들은 내년에 재산세를 얼마나 납부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따라서 지역 주민의 지방행정에 대한 관심은 남다를 수밖에 없었고, 지방정부의 예산낭비나 선심성 사업, 비리에 대한 주민의 감시가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특히, 공직자의 외유성 해외 연수나 기관의 업무 추진비는 그 개념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네 번째, 대부 분의 지방정부는 ‘생활자치’의 성격이 강하다. 4만여 개 지방 정부의 90%가 인구 1만 명 미만의 소규모 자치단체이고, 주된 기능이 주로 소방과 경찰 같은 주민 안전과 초중등 교육, 쓰레기 처리, 눈 치우기, 공원, 평생학습, 도서관 등 주민 생활과 밀접한 생활 업무 처리이다. 그러다 보니 지방 정부 단위에서는 정치와 행정이 분리되는 경우가 많다.
주민대표기관인 의회는 정치적 과정을 거쳐 정책 결정과 조례 개폐 등을 큰 틀에서만 결정하고, 집행업무인 행정은 전문행정가(City-manager)에게 맡겨 효율을 기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쓰레기 수거와 처리, 상하수도 등의 수질 관리, 도로관리, 심지어는 경찰과 소방, 교육까지 효율과 재정 절감을 위해 소규모 지자체들이 연합 (통합과 협력)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실용(實用)자치의 성격이 강하다.
다섯 번째, ‘자원봉사 중심의 참여행정’이 활성화되어 있다. 지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지방정부 인력의 상당수가 자원봉사자로 충원 된다. 특히 공공기관(박물관, 도 서관, 소방, 사회복지 등)이나 시설(공원, 체육시설 등)에서의 자원 봉사자 활용은 일반화되어 있다. 뉴욕시가 운영하는 센트럴 파크 (Central Park)의 경우 상근 직원은 200명에 불과하지만, 자원봉사자는 2000여 명에 달하고 있다.
소규모 지방정부의 경우 의회 의원도 자원봉사 성격의 비상근 명예직이 많고, 따라서 대부분 생업을 가지고 있어 의회 회기도 일과 시간 이후에 개최하며, 전문성 보완을 위해서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회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물론 미국의 주민자치 전통의 지방자치시스템은 단체 자치의 성격이 강한 우리 여건과 실정에 적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집권과 통제, 통일성이 강조되는 우리의 자치시스템에 다양성과 절차적 민주성, 생활 자치, 자원봉사 중심의 주민 참여등 미국식 주민 자치의 가치는 우리 지방자치가 더욱 성숙한 단계로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