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정책만으로 성과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예산과 인력으로도 어떤 지방정부는 혁신을 이루고, 어떤 곳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한다. 차이는 조직문화다. 성과를 내는 조직은 공무원을 더 오래 일하게 하는 대신, 시간을 시민 문제 해결에 집중하도록 설계한다. 에스토니아는 디지털 행정으로 시민 1인당 연간 4~5일의 시간을 절약하는데, 그 효과는 국내총생산(GDP)의 약 2%로 추산된다. 싱가포르에서는 공무원의 85%가 인공지능(AI) 활용에 자신감을 보였고, 72%가 AI 교육을 받았다. 싱가포르, 핀란드, 에스토니아, 뉴질랜드, 덴마크 다섯 나라는 제도는 달라도 세 가지 원칙을 공유한다. 첫째, 반복 업무를 줄여 공무원의 시간을 시민 문제 해결에 재배치한다. 둘째, 근무시간보다 목표와 성과, 데이터를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한다. 셋째, 실패를 숨기지 않고 학습과 협업의 자산으로 축적한다. 싱가포르는 AI로 반복 업무를 줄였고, 핀란드는 성과와 책임 중심으로 일한다. 에스토니아는 데이터를 연결해 행정 속도를 높였으며, 뉴질랜드와 덴마크는 성과 관리와 작은 실험을 혁신의 기반으로 삼았다. 지방정부 혁신의 핵심은 제도를 하나 더 만드는 데 있지 않다. 반복 업무를 줄
좋은 취지보다 분명한 목표가 먼저다 뉴질랜드는 오랫동안 결과 중심 공공 관리의 대표 사례로 연구되어 왔다. 재무부와 공공 행정 연구 자료는 뉴질랜드가 성과를 숫자로 관리하기 위해 결과 지향적 관리와 성과 측정 체계를 꾸준히 발전시켜 왔다고 설명한다. 특히 2012년부터 추진된 더 나은 공공서비스(BPS, Better Public Services) 프로그램은 국가 차원의 핵심적인 결과 목표를 설정해 공공 조직의 집중력을 높인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뉴질랜드의 강점은 '좋은 취지'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성과'를 중심으로 정책을 바라본다는 점이다. 공공정책은 대체로 좋은 목적을 내세운다. 그러나 좋은 취지만으로 조직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무엇을 언제까지 얼마나 개선할 것인 지가 분명해야 부처와 기관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뉴질랜드는 성과 목표를 숫자로 제시하고, 이를 예산과 기관 책임으로 연결하면서 공공 조직의 관심을 투입보다 결과에 맞추도록 했다. 복잡한 문제를 10개 성과 목표로 좁히다 BPS의 핵심은 복잡한 사회문제를 몇 개의 분명한 목표로 정리하고, 그 목표를 숫자로 추적했다는 데 있다. 정부는 청년 범죄, 복지급여 장기 수급, 교육 성과, 예방접종
실패를 숨기지 않는 공공혁신 문화 덴마크는 실패를 감추지 않고 학습으로 전환하는 공공 혁신 문화로 주목받아 왔다. 공공부문 전체를 포괄하는 단일 국가 통계가 싱가포르나 에스토니아처럼 선명하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여러 국제조사에서는 덴마크를 포함한 북유럽 국가 공공 조직의 상당수가 최근 몇 년 사이 혁신 활동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공공혁신 관측소가 정리한 ‘혁신 바로미터(Innovation Barometer)’는 덴마크,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의 공공부문 약 네 곳 중 세 곳이 서비스 개선, 업무 절차 개선, 조직문화 변화와 같은 혁신을 수행했다고 소개한다. 이는 혁신이 일부 기관의 특별사업이 아니라 공공조직 전반에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덴마크 통계청이 매년 발표하는 공공부문 혁신 통계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여준다. 상당수 공공기관이 지난 3년 이내에 최소 한 번의 혁신을 수행했다고 보고하며, 혁신 유형도 새로운 서비스 도입, 업무 프로세스 개선, 조직 관리 방식 변화, 시민 이용자와의 상호작용 개선 등으로 다양하다. 혁신 결과로 업무 효율성 향상, 시민 만족도 증가, 비용 절감, 환경 영향
EU 예산은 기다리는 돈이 아니다 유럽연합은 2021~2027년 결속정책 예산으로 프랑스에 184억 유로, 한화로 약 32조 원을 배정했다. 결속정책은 지역 간 격차를 줄이고 고용, 사회통합, 친환경 전환, 혁신을 지원하는 EU의 대표 투자 정책이다. 이 예산은 중앙정부가 일괄적으로 나눠주는 돈이 아니다. 지역과 도시가 어떤 사업을 설계하고 신청하느냐에 따라 실제 확보 규모와 활용 방식이 달라진다. 프랑스 제3의 도시권인 리옹 메트로폴(Méropole de Lyon)은 이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도시다. 리옹은 EU 예산을 도시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 수단으로 본다. 사회통합, 일자리, 도시재생, 기후중립, 스마트시티 사업을 EU 공모와 연결하고, 전담 조직과 도시 네트워크를 통해 사업을 발굴한다. 사회정책도 EU 자금으로 설계하다 리옹 메트로폴은 유럽사회기금 플러스(ESF+)의 위임 관리 기관이다. ESF+는 고용, 교육, 사회통합, 취약계층 지원을 위한 EU 재원이다. 리옹은 이 재원으로 2022~2027년에 사회적 취약계층의 직업 재통합, 여성 자립, 고용 접근성 강화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다. 리옹은 지역의 사회정책 목표를 먼저 세우고, 그 목표에 맞
쓰레기 처리 비용을 수익으로 바꾸다 덴마크 칼룬보르(Kalundborg)는 인구 약 2만 명의 소도시다. 그러나 산업생태학 분야에서 이 도시는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기업들이 서로의 폐기물과 부산물을 원료로 교환하는 ‘산업 공생(Industrial Symbiosis)’ 모델이 이곳에서 가장 먼저 작동했기 때문이다. 칼룬보르의 실험은 거창한 환경 정책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1970년대 초, 기업들이 물과 에너지, 원료를 더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협력하면서 시작됐다. 한 기업의 폐기물이 다른 기업에는 필요한 원료가 될 수 있다는 발견이 시작이었다. 폐기물 처리 비용을 줄이고, 원료 구매 비용도 낮출 수 있다면 기업이 협력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공장과 공장이 자원을 나누는 방식 칼룬보르 심비오시스(Kalundborg Symbiosis)에는 현재 17개 안팎의 공공·민간 기업과 기관이 참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참여 주체는 세계적 제약회사 노보 노르디스크(Novo Nordisk), 효소 기업 노보자임스(Novozymes), 아스네스 발전소(Asnæs PowerStation), 칼룬보르 정유소(Kalundborg Refinery), 지방정부와 공공 유틸리티 기관
보조금보다 중요한 도시의 조건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Austin)은 2020년대 들어 미국에서 빠르게 성장한 도시 중 하나다. 한때 대학도시이자 라이브 음악과 스타트업의 도시였던 오스틴은 이제 전기차와 반도체, 인공지능 산업이 모여드는 첨단 제조 거점으로 변하고 있다. 그 전환의 중심에는 테슬라 기가팩토리 텍사스와 삼성 오스틴 반도체가 있다. 오스틴의 변화는 한국 지방정부에도 익숙한 질문을 던진다. 기업은 왜 특정 도시를 선택하는가. 대규모 보조금과 세금 감면만 있으면 기업 유치가 가능한가. 오스틴이 보여주는 답은 조금 다르다. 기업을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빠른 행정, 안정적인 인력 공급, 대학과 기업이 연결되는 산업 생태계다. 테슬라가 바꾼 고용 지도 테슬라는 2020년 오스틴 인근 트래비스 카운티에 기가팩토리 텍사스 건설을 발표했다. 약 2,500에이커(약 1,011만㎡) 규모의 부지에 들어선 이 공장은 전기차와 배터리, 부품을 생산하는 대형 제조 거점이다. 공장 건물 면적만 1,000만 제곱피트(약 93만㎡)로 세계 최대급 단일 공장 건물 중 하나다. 공장이 들어서면서 전기차 산업을 중심으로 공급망과 고용 구조도 함께 이동했다. 고용 효과는 빠르게
인구 감소에 다른 방식으로 답하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북유럽 복지국가로 알려진 핀란드도 인구 구조 변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핀란드의 대표 도시 탐페레(Tampere)는 이 문제를 출산 장려금만으로 풀지 않았다. 아이를 더 낳으라고 호소하는 대신, 전 세계의 청년과 전문 인력, 창업자를 도시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택했다. 탐페레는 2025년 기준 인구 약 26만 명인 핀란드의 세 번째 도시다. 핀란드 남부의 주요 산업·교육·문화 거점으로 꼽히는 이 도시는 지역 대학과 기업, 시청을 하나의 인재 유치 시스템으로 묶었다. 외국인 유학생과 전문 인력을 일시적 체류자가 아니라 지역에 남을 생활인구이자 경제인구로 본 것이다. 외국인 유학생을 지역 인재로 바꾸다 핀란드 정부는 2021년 교육정책보고서에서 2030년까지 외국인 학위 유학생 수를 세 배로 늘리고, 외국인 졸업생의 75%가 핀란드 노동시장에 진입하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유학생을 많이 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졸업 이후 취업과 정착까지 연결하겠다는 전략이다. 탐페레는 이 국가전략을 도시 차원에서 구체화했다. 탐페레에는 탐페레대학교(Tampere University)와 탐
보조금에 기대지 않은 철도 모델 도시철도는 지방정부에 부담이 큰 사업이다. 건설비가 막대하고, 개통한 이후에도 차량·역사 관리, 안전 점검, 유지보수 비용이 계속 든다. 이용객이 많아도 운임 수입만으로 건설비와 운영비를 모두 회수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도시철도는 중앙정부 보조금, 지방비, 공기업 부채에 기대어 추진된다. 홍콩 MTR(Mass Transit Railway, 도시철도)은 이 구조를 다르게 풀었다. 도시철도 운임 수입만으로 운영하는 대신, 역 주변 개발권을 활용해 아파트, 쇼핑몰, 오피스에서 나오는 분양 수익과 임대 수익을 도시철도 건설과 운영 재원으로 돌렸다. 이른바 R+P 모델이다. 철도(Rail)를 놓고, 그 주변 부동산(Property)을 함께 개발해 수익을 내는 방식이다. 철도가 들어서면 역 주변 토지 가치가 오른다. 홍콩은 이 가치 상승분을 민간에만 맡기지 않고 도시철도 재원으로 회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철도역을 도시개발의 출발점으로 R+P 모델의 핵심은 개발권이다. 홍콩 정부는 MTR에 철도 노선과 역 주변 토지의 개발권을 부여한다. MTR은 이 권리를 바탕으로 민간 개발사와 공동 개발을 추진한다. MTR은 철도역만 지은 것
해외의 만남 지원 정책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다. 일부 정책은 ‘세금으로 소개팅을 시켜 주느냐’는 냉소와 함께 예산 낭비 논란에 휩싸였다. 문제는 만남 지원 자체가 아니라 설계 방식에 있었다. 청년의 삶과 지역 정착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체장의 홍보성 행사로 접근하거나, 참가자 수와 커플 성사 건수만 성과로 내세운 사업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실패 사례를 직시하는 일은 한국 지방정부가 이 정책을 도입할 때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실패한 정책의 공통 패턴 ● 보여주기 행사 지역 홍보용 사진만 찍고 끝나는 단발 이벤트 ● 억지 참가 관공서 직원 동원, 참가자 수 채우기 급급한 구조 ● 성과 숫자 집착 커플 성사 건수만 성과 지표로 삼는 방식 ● 사후 연계 부재 행사 후 관계 지속을 돕는 구조 없음 ● 인구정책과 단절 주거, 취업, 지역 정착 정책과 연결되지 않는 고립된 이벤트 실패한 만남 정책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사진 찍기 좋은 행사, 동원된 참가자, 커플 성사 건수 중심의 성과 관리, 사후 모임 부재가 반복된다. 행사 뒤 다시 만날 공간과 커뮤니티가 이어지지 않으면 만남은 일회성 경험으로 끝난다. 공공은 ‘중매인’이 아니라 ‘관계 설계자’다 일본의 여러
덴마크는 다른 나라와 접근 방식이 다르다. 정부가 소개팅 행사를 직접 주관하기보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주거 환경과 공동체 구조를 만드는 데 초점을 둔다. 이 배경에는 덴마크의 코하우징, 즉 ‘보펠레스스카브’ 문화가 있다. 코하우징은 각 세대가 독립된 주거 공간을 갖되, 공동 식당, 공용 주방, 세탁실, 텃밭, 작업실, 놀이 공간 등을 함께 쓰는 주거 방식이다. 덴마크의 합계출산율은 한때 1.7명 안팎을 유지하며 북유럽 국가 중 비교적 안정적인 편으로 평가됐지만, 최근에는 하락세가 뚜렷하다. 여기서 합계출산율이란 한 여성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자녀 수를 뜻한다. 현재의 연령별 출산 수준을 가정할 때 여성 1명이 생애 동안 몇 명의 아이를 낳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덴마크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4년 합계출산율은 약 1.47명 수준까지 낮아졌다. 억지 소개팅 대신 관계의 장 덴마크 코하우징의 출발점은 1970년대다. 세계 최초의 현대적 코하우징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세테담멘(Sættedammen)은 1972년 덴마크에서 조성됐다. 이곳은 여러 가구가 독립된 집에 살면서도 공동주택과 공동 공간을 중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