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직자의 입을 떠난 말은 허공에 흩어지지만 기록으로 남아 정책을 움직이고, 행동은 주민들의 기억 속에 신뢰의 형태를 빚어 낸다. 그렇다면 매일 책상 위에서 수없이 오가는 ‘보고서’와 ‘결재판’은 어떨까? 공직 사회에서 서류에 남기는 서명은 곧 권한의 행사이자 무한한 책임의 시작이다. 그러나 이 무거운 행위가 가장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고 분산시키는 ‘면피용 방패’로 전락하고 있다.
‘결재를 올렸다’는 마법의 주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공직자들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확신에 차서 하는 항변은 “서류상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혹은 “이미 윗선에 결재를 다 받은 사안입니다”라는 말이다. 다수의 도장이 찍힌 결재 서류는 훗날 감사가 들이닥쳤을 때 자신을 보호해 줄 완벽한 알리바이가 된다. 그들에게 서명은 책임의 완수
가 아니라, 책임으로부터의 탈출을 알리는 영수증에 불과하다.
본말이 전도된 완벽주의, 현장을 잃은 탁상행정
이러한 책임 회피의 심리는 기형적인 ‘보고서 만능주의’를 낳는다. 실질적인 현장의 갈등을 중재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데 써야할 에너지를, 오직 흠결 없는 서류를 만드는 데 쏟아붓는다. 보고서의 폰트와 줄 간격을 맞추고, 화려한 표와 미사여구로 빈약한 논리를 포장하는 사이 현장의 골든 타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규정에 어긋나지 않게 서류를 꾸며 놓았으니 내 할 일은 다 했다”는 행정 편의주의는, 서류 밖에서 고통받는 시민들의 실제 삶과 철저히 괴리된 ‘탁상행정’의 괴물을 만들어낸다.
서명은 방패가 아니라 ‘증명’이다
보고서는 실체를 담아내는 그릇일 뿐, 결코 실체 그 자체가 될 수 없다. 완벽하게 짜인 문서와 겹겹이 쌓인 결재 라인 뒤에 숨어 안전을 도모하려는 태도는 ‘직무 유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결재판에 서명하는 순간, 공직자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이 사안의 무게를 책임지기 위해 펜을 들었는가, 아니면 책임을 면하기 위해 펜을 들었는가.’ 그것은 오롯이 당신이 그 자리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증명하는 가장 무거운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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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행정의 성과, 어디에 있는가 공직자의 신뢰는 말(1월호)로 선언되고, 행동(2월호)으로 입증되며, 종국에는 문서에 남긴 ‘서명’으로 그 무게를 완성한다. 서류의 견고한 성벽 뒤에 숨어 안전을 외치는 자에게 혁신은 없다. 권한은 서류 위에 존재하지만, 행정의 진짜 성과는 언제나 서류 밖, 치열한 현장에 있다. |
[지방정부티비유=지방정부선거전략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