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는 행정 효율성과 시민 신뢰도 모두에서 유럽 최상위권을 자랑하는 국가이다. 특히 지방정부의 자율성이 강하고, 공공정책의 설계 과정에서 ‘실증’과 ‘시민 참여’가 중시된다. 오르후스시는 이러한 덴마크 행정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LAB@Aarhus(랩 앳 오르후스)’라는 실험 기반 행정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도시 전반의 정책 결정 과정을 실험 기반으로 구조화한 선도 사례다.
오르후스는 인구 약 35만 명의 중형 도시이지만, 덴마크 내에서 젊은 층 유입이 가장 활발하고 스타트업과 대학 연구기관이 밀집한 지역이다. 도시의 역동성은 행정 문제 해결 방식에도 유연함과 실험 정신을 요구했다. 기존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형식적인 행정 체계로는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문제를 충분히 감당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 결과 2014년부터 ‘LAB@Aarhus’가 본격 운영되기 시작했다.
LAB@Aarhus는 단일한 부서가 아니라, 도시 내 다양한 부서, 대학, 시민단체, 디자인 전문가, 기술기업, 정책학자 등이 느슨하게 연결된 플랫폼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수십건의 정책 실험이 기획되고, 실제로 짧게는 2주, 길게는 3개월에 걸쳐 제안 – 설계 – 실행 – 피드백 – 확산 또는 중단 결정 단계들로 실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은 단지 ‘현장 테스트’에 그치지 않고, 정책 자체의 설계 방식을 바꾸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차량 없는 도심 실험
2017년, 오르후스시는 도심 구역 한 곳(약 1km 구간)에 차량 진입을 제한하고, 오직 보행자와 자전거만 통행할 수 있는 실험을 시작했다. 실험은 3개월간 진행되었으며, 공공 와이파이, 임시 가판대, 그늘막 쉼터 등을 설치해 시민이 실제로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해당 구간의 소상공인 매출이 오히려 8% 증가했고, 시민 대상 만족도 조사에서는 90% 이상이 “도시가 더 쾌적해졌다”고 답변했다. 공기질 지수도 25% 개선되었으며, 보행자 교통사고 건수는 제로를 기록했다. 이후 시의회는 해당 구간을 ‘상시 보행자 전용 도로’로 조례화했다.
실업자 맞춤형 AI 상담 시스템
기존의 실업자 지원 시스템은 대면 상담이나 전화 중심이었고, 대기시간이 길어 만족도가 낮았다. 이에 LAB@Aarhus는 인공지능 기반 채팅 상담 시스템을 개발하여, 50세 이하 장기 실직자 100명을 대상으로 시범 운영했다.
이 시스템은 대화형 인터페이스를 통해 구직자의 경험, 희망 직무, 생활 조건 등을 자동 분석하여 맞춤형 일자리 정보를 제공했다. 3개월 운영 결과, 이용률은 기존 상담보다 3.2배 높았으며, 응답자 중 58%가 “기존 시스템보다 편리하고 도움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LAB@Aarhus가 특별한 이유는, 단지 실험이 많아서가 아니라 행정을 ‘가능성을 탐색하는 영역’으로 본다는 철학 때문이다. 실험이 실패해도 그것이 기록되고 다음 설계로 이어지며, 실패 자체가 자산이 되는 구조다. 이 플랫폼은 또한 ‘공무원 교육’ 역할도 한다. 행정 담당자는 실험 설계자이자, 시민 커뮤니케이터로서 참여하며, 정해진 예산과 법률 틀 안에서도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학습한다. 시는 이 경험을 기반으로 공무원 교육과정에 ‘실험 설계 실습’을 정례화하고 있다.
LAB@Aarhus는 EU의 스마트시티 시범 모델로 선정되어, 코펜하겐, 암스테르담 등 다른 도시에도 유사한 실험실 모델이 도입되었다. 2022년 OECD는 “거버넌스 혁신의 가장 구체적인 사례”로 이 정책을 소개했고, UN-Habitat는 “도시 단위 SDG 실현의 모범모델”로 평가했다.
한국에서는 예산 집행률, 연간 사업보고 중심의 행정 문화로 인해 실험 행정이 쉽지 않은 구조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구조일수록 ‘소규모 정책 실험’을 제도화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군·구청 단위에서 ‘정책 실험 제안 플랫폼’을 만들고, 주민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3개월 동안 시범적으로 운영한 후 정식사업화 여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티비유=최원경 리포터]